HEOANG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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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a do (2020)

‌마마 두 인 시트콤 / 유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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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박살 낸다. 아이는 어지른다. 아이는 뒤집는다. 아이는 드러눕는다. 아이는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아이는 협조하지 않는다. 아이가 다가온다. 아이는 이전에 알았던 삶을 잠식한다. 그렇게 아이는 자란다. 다리가 짧은 강아지는 두리번거린다. 강아지는 먹고 잔다. 강아지는 산책을 종용한다. 강아지는 바깥 공기를 맞으며 똥을 싼다. 그는 아이를 따라다닌다. 그는 아이가 어지른 것을 치운다. 그는 아이를 먹인다. 그는 아이가 흘린 것을 닦는다. 그는 강아지를 산책시킨다. 그는 강아지 똥을 치운다. 그는 털투성이 이불을 턴다. 그는 허겁지겁 먹는다. 그는 불면에 시달린다. 다음 날이 찾아오면 그 전날에 했던 행동을 반복한다.
 
  어쨌든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뚜껑 열린 머리에서 명랑하게 초록색 물질과 더불어 머리칼이 날아가고, 아이가 날아가고, 강아지가 날아간다. 일단 활짝 웃어본다. ^_^.‌ 1) 양팔에 가방을 주렁주렁 메고 앞으로는 아이를 달고 택시를 잡으려 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고, 영영 길가에 서 있을 것만 같다.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본다. ^∇^.2)  방해받지 않고 밤새 잠들어 본지는 이미 오래고, 지친 손목이 들고 있던 핸드폰이 얼굴로 수직 낙하한다. 그러려니 한다. ◎_◎. 3)
 
  인물은 주로 복잡한 현실 세계를 닮지 않은, 마치 효과음이 들릴 듯한 색면으로 구성된 배경 앞에 서 있다. 영겁으로 되풀이되는 돌봄 노동의 사이클은 밝은 색채와 크고 작은 도형들로 구성된 화면에서 펼쳐진다.4)  장애물 넘기 류의 오래된 비디오 게임을 연상하는 구도 속 캐릭터는 팔이 네 개라도 부족하고, 스태미나를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어쩐지 리드미컬하게 자리를 잡았다. 무더운 날 유아차를 끌며 끈적하게 녹아가는 분홍색 덩어리 뒤로 마치 이 폭염을 축하하듯 색종이 조각이 휘날린다.5)  장기가 여러 얼굴을 갖고 제각기 주장해댈 때, 그러니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아 이리저리 꼬여있는 상태조차 알약과 책이 아이템처럼 둥둥 떠다닌다.
 
  김허앵의 페인팅과 드로잉에 등장하는 도식적인 표정과 경쾌한 색면 배경은 주어진 상황을 일종의 시트콤 장르로 도해한다. 신비로울 것 없는 일상과 난해할 것 없는 플롯의 출산-육아 시트콤. 반복된 노동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난감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면 방청객이 와하하하 웃음을 터트릴 것 같다. 일종의 약속 묶음으로 구성된 이 장르는, “나도 이 상황이 웃기니까 님들도 웃어도 괜찮습니다”라거나 “이왕 그렇게 된 걸 뭐 어쩌겠습니까”라는 뒤끝 없는 신호를 보낸다. 피노키오의 지미니 크리켓, 뮬란의 무슈, 엘사와 안나의 올라프마냥 장면 속에 적절히 배치된 사이드킥 – 주로 코기가 담당하는 듯하다 – 은 주어진 갈등 양상에 탄력적으로 적응하는 태도를 강화한다. 신체적 한계와 반복된 노동, 목표치 달성의 좌절로 인해 서서히 고조되는 갈등과 축적되는 긴장은 예상치도 못한 엉뚱한 전개로 인해 해소되어 버린다.
 
  단, 이러한 긍정은 실제로 많은 시트콤이 그렇듯 이면의 어둠과 더불어 아이러니를 담아낸다. 이는 이전 드로잉 슬라이드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도식적인 얼굴 표현에서 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6)  ‘사람’들은 윤곽으로 헐겁게 표현된 몸에 반짝이고 아름다운 눈을 달고 등장한다. 예쁘게 그려 렌즈처럼 쓰고 다니는 것에 불과한 눈을 착용한 사람들은 태연하게 칼을 품고 다니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개인을 기꺼이 처형한다. ‘나쁜’ 사람들의 ‘아름다운’ 눈은 세상의 추악한 이면을 교조적으로 고발하기보다 그 아이러니를 인정하는 동시에 이를 완충하고자 한다. 언제라도 잔인하게 ‘못난/모난’ 것을 처단할 수 있는 사람들의 빛나는 눈은 잔인하지만, 그것은 일부 극악무도한 사람의 작태가 아니라 충분히 아름다운, 평범한 사람의 것이다. 모두가 칼을 끼고 뒷짐을 지고 있지만, 서로 함께 있어 줄 줄도 알고 때로는 의외의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광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반짝이는 눈이 얼마간 모여 동반 상승할 때 발견되는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의외로 잔인한 세상 속 통제 불가한 상황에서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존엄은 이를 담는 배경이나 사운드트랙, 혹은 장르를 선택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시트콤 ‘Mama do’는 일상적인 좌절이 영속된 고통으로 빠져들지 않게끔 하고,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것들을 잃지 않도록 하는 뼈대가 되어준다.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이나 여러 관계의 양상을 집중적으로 담은 아크릴 드로잉은 습관처럼 스마트폰으로 찍은 일상의 장면 같지만,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지켜낸 일상의 영역들을 보여준다. 아이가 등장하기 전부터 알았던 친구들과 여전히 삶을 나눈다. 인생의 챕터는 하나에서 다음으로 싹둑 잘려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예전의 주사7) 나 몇 년 전에 좋아했던 노래를 대동하여 등장한다. 아이를 매개로 만난 다른 양육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아이와 함께 산다고 해서 이전에 맛있던 것이 떫어지지 않는다.8)  비록 신체의 변화로 인해 담배는 피우지 못하게 되어도 여전히 마음으로 담배를 피운다. 9) 그 사이로 슬쩍 코를 파는 아이가,10)  악어와 큰 고양잇과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가11)  등장한다. 자꾸만 민폐를 끼치고 죄송한 사람이 될 때면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가끔 뜬금없는 것에 웃고, 미처 이루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그리고는 또 하루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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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없었던 과거의 삶과 지금의 삶,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장소와 아이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장소, 비교적 건강했던 몸과 예전 같지 않은 몸, 오로지 나만의 것이었던 시간과 여러 갈래로 조각난 시간. 김허앵의 시트콤 ‘mama do’는 이 구분을 거부하지 않되 대인배 마냥 웃으며 이리저리 엮는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요망진 눈으로 당당하게 앞으로 걸어 나간다.  파괴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양육자를 잔여 가스처럼 뿜어내며 전진한다. 아이가 걸어갈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운 눈을 끼운 잔인한 사람들의 것일지 모르겠지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입장에서 더 나은 것, 어쩌면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것이 이 시트콤 다음 시즌의 과제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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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글부글 끊어오른 머리통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다〉, 53*33.2cm, 캔버스에 유화, 2019.
2)〈Where is My Fucking Taxi〉, 20*21cm, 종이에 연필, 2018.
3)〈잠이 안와〉, 21*30cm, 종이에 아크릴, 2019.
4)〈Daily Routine〉, 130.3*130.3cm, 캔버스에 유화, 2019.
5)〈한여름의 산책〉, 72.5*116.3cm, 캔버스에 유화, 2018.
‌6)〈선량한 사람들의 세계〉, 2013.
‌7)〈초록토 해은이〉, 13*12cm, 종이에 아크릴, 2019.
‌8)〈자작하는 상희〉, 18*18cm, 종이에 아크릴, 2019.
9)〈마음으로 피는 담배 500개피〉, 27*21cm, 종이에 아크릴, 2019
‌10)〈당당하게 코파기〉, 21*18cm, 종이에 아크릴, 2019.
‌11)〈아빠의 미술수업〉, 21*30cm, 종이에 아크릴, 2019; 〈악어매니아를 위한 악어 그리기〉, 21*21cm, 종이에 아크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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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으로 증언하고 몸부림치며 살아내기 / 윤민화 

아이를 기르는 일. 이것을 우리는 육아라고 말한다. 이성애 규범이 특권으로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출산과 육아는 장려해야만 하는 생산성을 위한 수단이다. 출산이 곧 애국이 되는 이곳은 아이라는 기표를 통해 밝고 희망찬 미래를 제시하려고 한다. 미래를 위한 투자, 미래의 노동력, 국가를 위해 헌신할 새로운 세대이자 인간이라는 종(種)을 위한 재생산으로서 아이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재생산적 미래주의(reproductive futurism)에 입각한 규범과 정책들은 아이를 배태하고 생산할 생물학적 여성을 포궁1)으로 치환한다. 따라서 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구간의 고난과 고통은 발설하면 안 되는 금기가 된다.


  여학생은 ‘가정’을, 남학생을 ‘기술’ 교과를 배우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정보는 누락된 채 바느질과 요리와 같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엄마의 역할에 커리큘럼이 맞춰져 있었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미디어는 여전히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관해서는 대중의 눈을 흐리게 하느라 급급하다. 산모의 산후관리는 출산의 경험이 있는 여성 연예인이 ‘꿀정보’라며 전달하는 고가의 마사지 용품으로 소비되고, 영아기와 유아기에 해당하는 아이를 고작 주말 동안 돌보는 아빠는 슈퍼맨이 되어 돌아온다. 어린 시절에 엄마들이 즐겨 읽던 『여성동아』, 『여성중앙』은 ‘주부’라는 정체성을 가공하고 또 가공한 나머지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며 주부라는 부르주아적 이미지를 선망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었다. 주부라는 카테고리에 부록처럼 딸려 오는 육아, 요리, 남편 내조와 같은 일상은 너무 세련되고 몹시 정갈하여서 잡지 속의 비현실적 행복을 욕망하면서도 혐오하게 만들었다.


   시대가 바뀌어 예전에 잡지가 노출시킨 가정성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소셜 미디어가 담당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인스타그램에서 소비되는 비정상적으로 가공된 아이들의 이미지가 그렇다. #육아스타그램 으로 검색하면, 셀프 카메라 어플을 사용해서 필터를 입힌 아이들의 사진이 잔뜩 나온다. 기이하리만큼 눈이 크고 턱이 뾰족한 서구적 이목구비를 가진 신생아 사진 밑에 댓글이 달린다. “너무 예뻐요. 실례지만 아기 옷 어디에서 구입하셨어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공모로 가공된 아이의 이미지는 선망을 부추기는 기표가 되어 아이의 엄마는 ‘좋아요’의 횟수만큼 행복해진다.


  김허앵의 ‘엄마하기’가 재생산적 미래주의가 주창하는 낙관주의를 정확히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를 기르는 엄마에게 ‘미래’나 ‘희망’, ‘인류’같은 소리는 ‘자아 실현’이나 ‘행복’, ‘긍정’과 마찬가지로 손에 잡히지 않는 무지개에 불과하다. 아이를 길러내는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다 걸어야만 하는 상황을 인정하고 포용하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지난 개인의 역사를 다시 쓰는 일 일 테니 말이다. 사회 구조적, 제도적, 규범적으로 충실히 언어화되기에 부대낌 없던 결혼 전의 삶과 임신으로부터 비롯된 그 이후의 전혀 다른 삶 사이의 불균형을 직면하게 되는 일은 천지가 개벽하는 것과 맞먹는 파급을 동원한다. 바바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가 긍정성에 관해 지적했듯이, 이 사회가 엄마에게 떠넘기는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옷이 아무리 애를 써도 몸에 맞지 않는다면 부정하면 그만이다. 물론 이러한 부정성의 효과에는 광기, 정신병, 우울 그리고 살인이 동원될 수도 있다는 점도 일러둬야 하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낳고 미치거나, 죽거나, 죽였다.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쓴 『누런 벽지(The Yellow Wallpaper)』에는 우울증에 걸린 여성이 등장한다. 의사인 남편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 방에 감금되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주인공은 벽지에 집착하게 된다. 벽지의 기이한 문양 뒤에 여성들이 갇혀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주인공은 벽지를 찢고 네 발로 기어 다닌다. 이를 보고 충격 받아 쓰러진 남편 위를 기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빠져나왔어요.”

  실제로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이 산후 우울증을 앓게 된 경험을 기반으로 집필한 것이다. 작가는 산후우울증에 대한 처방으로 ‘휴식 치료’를 강요받게 되는데, 지적인 활동은 두 시간 이내로 제한하며 강제로 절대 안정을 취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산후우울증에 대한 처방이 휴식을 빙자한 감금이라는 점은 퍽 아이러니하다. 굳이 처방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육아는 고립, 감금, 정신적 마비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르누아르 풍의 그림에서 한껏 차려입은 엄마와 요람에 누운 아이가 햇빛이 충만하고 녹음이 무성한 풀밭 위에서 소풍을 즐기는 풍경은 부르주아적 가정생활의 선망을 자극하는 여성 잡지 만큼이나 유해하다. 이런 그림들이 유통되면 될수록 많은 여성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집 밖에 나가는 자유를 빼앗긴다는 점은 은닉된다. 82년생 김지영은 어떤가. 김지영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 커리어를 포기하면서 미쳤다. 사실 현실의 육아를 직면할 때 여성이 겪는 정신적 충격은, 관객에게 연민을 조장하느라 헛소리를 하는 정도로 곱게 미친 김지영이 아니라 벽지를 뜯으며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쪽에 더 가깝다.

  김허앵의 《mama do》는 시종일관 엉뚱한 유머 감각과 해학으로 육아 일상을 그려내지만 동시에 본능적이고 광적이라는 점에서 에런라이크적 긍정성과 부정성이 마찰하면서 발생하는 징후를 발견하게 된다. < 부글부글 끓어오른 머리통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다 >에서 머리통이 날아가는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양만 봐도 그렇다. 목 늘어난 셔츠와 듬성듬성 빠진 머리칼이 퍽 안쓰럽게만 느껴지지 않는건 자학을 농담조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임기2) 속에 갇혀서 끝없이 아이가 어질러 놓은 장난감을 치우는 < Daily routine >이『누런 벽지』과 다를게 뭔가. 처진 뱃살을 시무룩하게 쳐다보고, 얼굴색이 누렇거나, 보라색이거나, 심지어 녹색이 된 (주로 널브러져 있는) 김허앵이 짓궂은 표정으로 “나는 (육아 게임에서) 빠져 나왔어요”고 말하는 상상을 해본다. 89년생 김허앵은 김지영처럼 곱게 미치는 대신 흘러내리는 중이다. 르누아르 풍의 그림처럼 결코 산뜻하지만은 않은 < 한여름의 산책 >에서 김허앵은 액체가 되어 흐른다. 실제로 김허앵은 육아를 “액체”적으로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아이의 변이나 침과 같은 배설물, 엄마의 젖, 항상 감기에 걸려 흐르는 콧물, 땀에 젖은 배냇머리와 축 늘어져 있는 엄마의 티셔츠와 같이 육아의 일상은 축축하거나 끈적이거나 흘러내린다.

   ‘엄마하기’는 결코 선형적이지 않은 개인 서사로의 이행, 단일한 상태에 머무르지 못하는 침범과 범람의 일상, 단절과 전환의 반복으로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는 비일관된 자아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비고정적이고, 그 자체로 혼란이며, 정체성의 규범과 경계가 사라진 액체의 상태로 살아가기이다. 지난 날 여성 미술이 ‘엄마하기’의 자아를 주로 자폐적으로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으로 그려냈다면, 김허앵은 차라리 코미디로 그 혼란을 폭로하는 쪽을 택했다. 고혹적으로 요람 곁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여유로운 미소로 일관하는 주부의 표상은 정물화와 다르지 않다. 닫힌 프레임 속에 들어선 정물화처럼 박제된 주부의 공간에 김허앵은 만화 캐릭터와 같은 모습으로 등장해서 씩 웃어 보인다.

  김허앵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허용치 안에서 소비되는 용도로서 ‘엄마하기’의 이미지를 부정하고, 오히려 ‘엄마하기’에 수반되는 광적인 날들을 유머와 해학으로서 농담처럼 증언한다. 그리고 그 증언을 자신의 예술가적 정체성으로 환원시키고자 몸부림치며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김허앵이라는 육아하는 자신을 현모양처도, 아줌마도, 주부의 이미지도 아닌 스스로 가공한 선택지에서 창안하고자 시도한 그 의지가 결국 김허앵이라는 엄마를 예술가로서 살도록 할 것이다.



1) ‌포궁(한문: 胞宮)은 자궁(한문: 子宮, 영어: uterus)의 다른 말이다. 실생활에서는 자궁이라는 단어가 포궁보다 절대적으로 많이 쓰이고 정식 의학용어도 자궁이다. 그러나 자궁의 아들 자자를 피하기 위해 포궁이라는 단어를 쓰자는 움직임이 있다

‌2) 실제로 참조한 게임은 너구리 게임이라고 한다.




BAD ENDING ~어쩐지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2015)


 
 수십 장의 이미지가 순서에 따라 영사되고 있다. 언제부터 필름이 돌아가고 있었는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필름이 남아있는지, 지금 막 전시장에 들어선 사람은 알 길이 없다. 주어진 선택지는 하나, 원형으로 돌고 도는 환등기의 타임라인에 승차해 날렵한 사냥꾼처럼 이미지를 쫓는 것이다. 차례차례 지나되는 장면들은 총 80장의 드로잉으로 구성된 다섯 개의 이야기다. 등장하는 인물의 생김새/배경이 조금씩 다른 각 장면들은 때로는 자연스레, 때로는 거칠게 접붙어 이어진다. 작가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은 어쩌면 우리의 인내를 필요로 한다.

  김허앵은 평소 생활에서 불가피하게 마주치는 것들-사람 혹은 사건들을 재료로 이야기를 짓는다. 각각의 이야기는 적게는 8장에서 많게는 27장까지로 구성되었다. (만화처럼 컷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나름의 서사를 전개하는 다섯 개의 이야기는 각각 독립적인 단편이지만, 이로부터 작가가 즐겨쓰는 도상이나 상징들이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 반짝이는 인형, 눈처럼 생긴 렌즈, 입과 귀가 없는 사람들, 식칼과 담배, 작은 식물 등. 도상들의 기원은 < 선량한 사람들의 세계 >(2013)로 거슬러오른다. 이 작업은 대형 캔버스에 직관적인 붓질로 화면을 채우던 작가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의 형식을 전환하게 된 시발점이기도 하다.  

  < 선량한 사람들의 세계 >는 렌즈를 낀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일을 반복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중 불현듯 입이 생겨버린 한 사람은, 안구를 끼는 대신 망태기를 쓰고 다니며 유별난 행동을 일삼는다. (그는 결국 모종의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개조당함으로써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쉽게 조지 오웰나 올더스 헉슬리를 떠올리게 하는 이런 전개는 너무 ‘안온’하고 ‘자유’롭게 통제되는 사회, 그 안의 권태로운 개인, 이어지는 몇 가지 시도와 실패로 귀결되는 디스토피아 소설의 서사다.

  한편, 배경과 인물을 설정하고 주인공에게 적당한 위기와 기회를 제공하는 김허앵의 전개는 < 심즈 >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과도 닮아있다. 모니터 화면 속에 견고한 가상의 삶을 구현하는 < 심즈 >는 유저에게 두 개의 입장을 동시에 제공한다. 첫째는 신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심SIM들을 조종하는 것, 둘째는 1인칭의 욕망을 심SIM에게 이입하는 것이다. (< 심즈 >, < 문명 >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의 광적인 마니아인) 김허앵은 스스로 분명한 자각 속에 이 두 개의 입장을 모호하게 뒤섞는다.

  불행은 도처에 있다. 희망이 손에 넣자마자 빛이 바래는 새장 속의 파랑새라면, 불행은 “절망이 앉아있는 벤치”(자크 프레베르) 위를 어슬렁거리는 비둘기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비극적인 것은 입버릇처럼 모두가 ‘납작’하다고 굳게 믿는 세계에서, 관찰자의 세계와 수행자의 세계가 드러내는 아찔한 깊이의 차이다. - 세종대로를 걸으며 앞에 ‘글로벌’이 붙는 부스축제를 감상하고, 일민미술관의 재기발랄한 전시를 지나쳐,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소란과 난민구호를 위한 서명운동 틈에서, 죽은 눈의 항의자들과 젊고 건강한 경찰들의 형광색 반짝임을 마주할 때의 어지럼증 같은 것들. 무력감은 그런 곳에서 온다.

  김허앵의 불행은 (언급한 소설과 게임의 교차점에서, 실은 그 두 가지 모두가 선취하지 못한) 현재적인 감각으로 쪼개지고 나열되어 있다. 다섯 개의 서사와 즉석 사진 같은 페인팅은 작가가 오랫동안 골똘히 상상해왔던 불행의 퍼즐 조각들이다. 퍼즐이 맞춰졌을 때 드러날, 당신의 ‘배드 엔딩’은 무엇인가?

글 이미정, 윤율리  




  횡단보도를 건널 때 문득 덤프트럭에 잔인하게 치이는 상상을 한다. 그대로 죽지 못하고 불구가 되어 의식만 또렷이 남은 나의 모습을 본다. 그러다 신호가 바뀌면 아무 일도 없이, 유유히 길을 건넌다. 나는 습관적으로 나의 불행한 미래를 자주 상상하곤 한다. 마치 온 세계가 나를 향해 불행해지라고 기도라도 하는 것처럼 늘 어두운 미래만을 떠올린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꽤 노력하는 편이다. 대단한 노력이라기보단, (무단횡단을 전혀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치이더라도 보상금을 받을 수 있게 흰색 선을 따라 걷는, 그런 작고 사소한 행위들을 신경 쓰며 살아간다. 이러한 노력에는 “이렇게 하면 불행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사건이 터진다면 역시 이 세계는 나를 불행하게 하도록 설계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양가적인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권태로운 일상에 질려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생활로 나아가지만 어느덧 원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상황이나 사건, 상징들은 내가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나의 물음이면서 스스로가 내린 답이기도 하다. (…) 결국 모든 것이 잘 되지 않을 거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야기 속 주인공은 망태를 만들고 칼을 간다. 과연 자신이 상상한 결말이 다가올 것인지 기대하면서. 물론 잘 되든 그렇지 않든, 그 둘 모두가 예측된 미래일 뿐이다.

작가노트 김허앵 / 편집 윤율리


세계의 멸망(2014)에 부쳐

B는 폭파버튼을 눌렀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조연이었기 때문에 그가 무언가를 할 수 있으리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계는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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